포츠머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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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츠머스 FC는 1898년 창단된 잉글랜드의 프로 축구 클럽으로, 프라턴 파크를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1900년대 초반 남부 풋볼 리그와 웨스턴 풋볼 리그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며, 1939년과 2008년 FA컵에서 우승했다. 1948-49, 1949-50 시즌에는 1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2002-03 시즌에는 1부 리그에서 우승했고, 2016-17 시즌에는 리그 2에서 우승하며 잉글랜드의 4개 프로 리그를 모두 우승한 5개 클럽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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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머스 FC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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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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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네임 | 포츠머스 풋볼 클럽 (Portsmouth Football Club) |
별칭 | 폼페이 (Pompey) |
창단 | 1898년 4월 5일, "포츠머스 풋볼 앤 애슬레틱 컴퍼니 리미티드"로 창단 |
구장 | 프래턴 파크 |
수용 능력 | 20,899명 |
소유주-회장 | 마이클 아이스너 |
최고 경영자 | 앤드류 컬렌 |
감독 | 존 무시뉴 |
현재 시즌 | |
현재 시즌 | 2024–25 포츠머스 FC 시즌 |
리그 | EFL 챔피언십 |
클럽 색상 | |
클럽 색상 | 파란색 |
홈 유니폼 | 상의: 파란색 하의: 하얀색 양말: 빨간색 |
원정 유니폼 | 상의: 검은색 하의: 검은색 양말: 검은색 |
써드 유니폼 | 상의: 청록색 하의: 청록색 양말: 하얀색 |
연락처 | |
웹사이트 | portsmouthfc.co.uk |
2. 역사
포츠머스는 1898년 잉글랜드 남해안 도시에서 창단된 프로 축구팀이다. 1939년과 2008년에 FA컵에서 우승했고, 2010년에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1949년과 1950년에는 리그 정상에 올랐다.
21세기 초반, 포츠머스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7번 우승한 AC 밀란과 같은 팀들을 상대로 유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시기 글렌 존슨, 저메인 디포, 피터 크라우치, 데이비드 제임스, 솔 캠벨 등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들을 배출했다. 해리 레드냅 감독은 69년 만에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2년 뒤 다시 FA컵 결승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구단주가 자주 바뀌면서 재정난을 겪었고, 승점 삭감과 함께 챔피언십(2부 리그)으로 강등되었다. 법정 관리에 들어가면서 3부 리그, 4부 리그까지 추락했다. 2013년, 영국 고등법원의 구단 해산 위기에서 포츠머스 서포터 트러스트(PST)가 구단을 인수하며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서포터 소유 구단이 되었다.
2017년, 포츠머스는 EFL 리그 투에서 우승하며 EFL 리그 원으로 승격했다. 이는 잉글랜드 4개 프로 축구 리그를 모두 우승한 5번째 클럽이 되는 기록이었다. 1921년부터 1958년까지 운영된 풋볼 리그 서드 디비전(당시 3부 리그)까지 포함하면, 울버햄프턴과 함께 잉글랜드 5개 프로 축구 리그를 모두 우승한 유일한 클럽이다.
2017년, 전 디즈니 CEO였던 마이클 아이스너의 투자회사인 토르난테 컴퍼니가 구단을 인수했다.
2. 1. 1898-1920: 창단과 초기


포츠머스 FC는 1898년 4월 5일, 올드 포츠머스의 12 High Street에서 존 브릭우드를 회장으로 하여 ''"The Portsmouth Football and Athletic Company"''로 창단되었다. 포츠머스 FC의 창립은 1898년 4월 5일에 합의되었지만, 1899년까지 축구 경기장이나 선수팀은 존재하지 않았다.
1899년, 포츠머스 밀턴, 포츠머스의 골드스미스 애비뉴 근처의 이전 농지를 새로운 축구 경기장으로 개발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땅은 1898년에 지역 골드스미스 농가로부터 매입한 것이었다. 새로운 축구 경기장은 근처의 프라튼 기차역에서 이름을 따 프라튼 파크로 명명될 예정이었다. 프랭크 브레텔은 1899년 2월 포츠머스 FC의 초대 매니저 겸 비서로 발표되었다.[3][4] 포츠머스는 남부 풋볼 리그 1부 리그로의 직접 진출을 신청했고, 하위 리그에서의 시험 기간 없이 받아들여졌다.[5] 클럽은 1899–1900 시즌을 위해 남부 풋볼 리그 1부 리그에 참가했다.
포츠머스의 남부 풋볼 리그 1부 리그에서의 첫 시즌인 1899–1900 시즌은 성공적이었으며, 28경기 중 20경기를 승리하여 챔피언인 토트넘 홋스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00–01 남부 풋볼 리그 1부 리그 시즌에서 포츠머스는 3위를 기록했고, 1900–01 웨스턴 풋볼 리그에 합류하여 1부 리그 챔피언으로 마감했다.[6] 포츠머스는 1901–02 남부 풋볼 리그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승격하지 못했다. 1902–03 웨스턴 풋볼 리그에서 포츠머스는 3시즌 연속 1부 리그 챔피언십을 획득했다.[6]
1906–07 웨스턴 풋볼 리그에서 1부 리그는 'A'와 'B' 구역으로 나뉘었고, 두 구역 우승자 간의 플레이오프를 통해 1부 리그 챔피언을 결정했다. 웨스턴 풋볼 리그 마지막 출전에서 포츠머스는 1부 리그 'B' 구역에서 4위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1부 리그의 분할된 'A'와 'B' 구역의 14개 팀은 모두 웨스턴 풋볼 리그에서 사퇴했다. 포츠머스는 다음 시즌에 강등되기 전, 6위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사이에 심각한 재정 위기가 발생했고, 1911년 5월에 실시된 기금 모금에 대한 대중의 호소가 클럽을 유지시켰다.[7]
팀은 1911–12 남부 풋볼 리그 2부 리그에서 2위를 차지하며 승격했다. 그러나 클럽의 재정은 다시 어려움을 겪었고, 손실과 부채는 10000GBP까지 증가했다.[7] 1912년 5월 8일에 주주총회가 소집되었고, 창립자이자 이사 중 한 명인 조지 루윈 올리버는 "''The Portsmouth Football and Athletic Company''"를 해산하고 더 기업 지향적인 회사로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원래 회사는 부채를 제거하기 위해 청산되었고, 1912년 7월 27일에 "''Portsmouth Football Company Ltd''"가 포츠머스 FC의 새로운 모회사로 설립되었으며, 이사회는 상당한 재정적 보증을 제공했다. 1898년 창립 이사였던 조지 루윈 올리버는 새로운 포츠머스 FC 회장이 되었다.[8]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축구는 중단되었다. 1919–20 시즌에 경기가 재개된 후, 포츠머스는 두 번째로 남부 리그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포츠머스는 창립 멤버로 풋볼 리그 3부 리그에 선출되었다.
2. 2. 1920-1939: 풋볼 리그 참가와 FA컵 우승
포츠머스는 1923-24 시즌에 우승을 차지했고, 다음 시즌 2부 리그에 데뷔하여 4위를 기록했다. 1926-27 시즌에는 준우승을 차지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고, 이 과정에서 노츠 카운티를 9-1로 꺾어 클럽 역대 최고 점수차 승리를 기록했다. 1927-28 시즌 1부 리그 데뷔 시즌은 고전하여 강등권 바로 위인 한 점 차로 간신히 잔류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츠머스는 1929년 FA컵 결승전에 처음으로 진출했지만 볼턴 원더러스에게 패했다.[135]1929년부터 1934년까지 포츠머스는 1부 리그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다. 1933-34 시즌에 다시 한번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맨체스터 시티에게 패했다. 1938-39 시즌, 포츠머스는 세 번째 FA컵 결승 진출 만에 울버햄튼 원더러스를 4-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FA컵 경기가 중단되었고, 포츠머스는 1945-46 시즌 재개될 때까지 트로피를 보유했다.[135]
2. 3. 1946-1979: 전후의 영광과 침체
풋볼 리그가 재개된 1946–47 시즌에 포츠머스는 1948–49 시즌에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밥 잭슨 감독의 포츠머스 팀은 다음 1949–50 시즌 마지막 날 애스턴 빌라를 5-1로 꺾고 득점 득실차로 2시즌 연속 풋볼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다음 1950–51 시즌에서 포츠머스는 7위를 기록했다. 이전 시즌에 강등을 간신히 면한 포츠머스는 1958–59 시즌 말에 1부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며 32년 동안의 1부 리그 잔류를 마감했다.1960–61 시즌 포츠머스는 2부 리그 강등권에서 두 번째로 낮은 순위를 기록하며 다시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조지 스미스의 지도 아래, 포츠머스는 3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첫 번째 시도에서 2부 리그로 승격했다. 제한적인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지 스미스 감독은 1960년대 나머지 기간 동안 포츠머스의 2부 리그 지위를 유지했다. 포츠머스는 1975–76 시즌에 2부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며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1976–77 3부 리그 시즌 11월, 구단은 부채를 갚고 파산을 면하기 위해 £25,000을 모금해야 했다. 구단의 재정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선수들을 팔아야 했고, 대체 선수를 위한 돈이 없어 포츠머스는 경험이 없는 젊은 선수들에게 의존해야 했으며, 1976–77 시즌을 3부 리그 강등권에서 단 한 계단, 승점 1점 차로 마감했지만, 1977–78 새 시즌 말에 최하위로 마감하며 강등되었다.
2. 4. 1979-2003: 부활과 프리미어리그 승격
프랭크 버로우스 감독의 지휘 아래, 포츠머스는 1979-80 시즌 4위를 기록하며 3부 리그로 승격했다. 1983년에는 3부 리그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하며 2부 리그로 복귀했다. 1986-87 시즌에는 더비 카운티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며 1958-59 시즌 이후 처음으로 1부 리그로 승격했다. 그러나 1987-88 시즌 중반, 구장은 열악한 상태였고 구단은 재정난에 직면하여 곧바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1988년 여름, 구단주 존 디콘은 런던 사업가이자 전 퀸즈 파크 레인저스 회장인 짐 그레고리에게 클럽을 매각했다.1989년 1월 23일, 구단의 모회사 명칭은 '포츠머스 풋볼 컴퍼니 리미티드'에서 '포츠머스 풋볼 클럽 리미티드'로 변경되었다.[13] 포츠머스는 강등권에서 두 계단 위에 위치하며 시즌을 마쳤다. 1992–93 풋볼 리그 시즌, FA 프리미어 리그가 새로운 1부 리그가 되면서 포츠머스는 새로운 "1부 리그"에서 뛰게 되었지만,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보다 단 한 골 적게 득점하여 자동 승격에 실패했다. 이후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레스터 시티에 합계 2-3으로 패했다.
1997년 2월, 테리 베너블스는 클럽 지분 51%를 1파운드에 매입하며 회장직을 맡았다.[14] 1998년, 그는 자신의 지분을 마틴 그레고리에게 다시 매각했다. 앨런 볼은 1998년 1월 26일 두 번째로 감독으로 복귀했고, 시즌 마지막 날 1점 차로 3부 리그 강등을 면했다. 포츠머스의 100주년 시즌인 1998-99 시즌, 구단은 재정 위기를 겪었고 1998년 12월 재정 관리에 들어갔다.[15] 1999년 5월, 세르비아 출신 미국 사업가 밀란 만다리치가 포츠머스를 인수했다.[16] 앨런 볼은 1999-2000 시즌 중 해고되었고, 토니 풀리스가 팀을 이끌었다. 포츠머스는 2000-01 시즌 마지막 날, 허더즈필드 타운을 제치고 강등을 면했다.[17] 2001년 8월 5일, 포츠머스 골키퍼 아론 플라하반이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구단은 그의 1번 유니폼을 시즌 동안 결번 처리했다. 2002년, 해리 레드냅이 감독이 되었다. 17위로 시즌을 마친 후, 그는 2002-03 시즌에 1부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며 팀을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켰다.[18]
2. 5. 2003-2017: 프리미어리그 시대와 몰락
포츠머스는 2003-04 시즌 프리미어리그에 데뷔하여 해리 레드냅 감독의 지휘 아래 13위를 기록했다. 2004년 11월, 레드냅 감독은 회장과의 불화로 팀을 떠났고, 이후 여러 감독을 거쳐 2005-06 시즌에 다시 레드냅 감독이 복귀했다.[19] 2006년, 사업가 알렉상드르 가이다마크가 클럽을 인수하면서 선수 영입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2006-07 시즌에는 9위를 기록했다.
2007-08 시즌, 포츠머스는 리그 8위를 기록했고, FA컵 결승전에서 카디프 시티를 꺾고 69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FA컵 우승으로 포츠머스는 2008–09 UEFA 컵에 출전하여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대항전에 참가했다. 2008년 10월, 레드냅 감독은 다시 팀을 떠났고, 토니 아담스가 감독으로 승진했다.[20] 2008년 11월, 포츠머스는 AC 밀란과의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아담스 감독은 2009년 2월에 해임되었고, 폴 하트가 임시 감독을 맡아 14위로 시즌을 마쳤다. 재정 문제로 인해 포츠머스는 핵심 선수들을 판매해야 했다. 2009년 8월, 알 파힘이 클럽을 인수했다. 2009-10 시즌 초, 재정난으로 인해 선수 이적 금지 조치를 당했다.
2009년 11월, 아브람 그랜트가 감독으로 부임했다.[21] 2009년 12월, HM 수입 및 세관(HMRC)은 고등 법원에 포츠머스에 대한 청산 소송을 제기했다.[22] 2010년 3월, 청산 소송은 취하되었지만,[23] 포츠머스는 행정 관리로 인해 승점 9점을 삭감당했다.[24]
포츠머스는 강등되었지만, 2010 FA컵 결승전에서 첼시에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25] FA컵 결승 진출에도 불구하고, UEFA 유로파 리그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26] 2010년 8월, 발람 체인라이가 클럽을 인수했다.
2010년 10월, 포츠머스는 행정 관리에서 벗어났고, 체인라이가 클럽 경영권을 되찾았다.[27] 2011년 6월, 블라디미르 안토노프 소유의 Convers Sports Initiatives (CSI)가 클럽을 인수했지만, 2011년 11월 안토노프는 자산 횡령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28][29] 그는 CSI가 행정 관리에 들어가면서 포츠머스 회장직에서 사임했다.[30] 2012년 2월, 포츠머스는 2년 만에 두 번째로 행정 관리에 들어가 승점 10점을 삭감당했다.[31][32] 2011-12 시즌, 챔피언십에서 강등되어 30년 만에 3부 리그로 내려갔다.
리그 원으로 강등된 후, 모든 프로 선수들이 팀을 떠났다.[33] 2012년 12월, 재정 문제로 승점 10점을 추가 삭감당했다.[34] 2012년 11월, 찬라이는 클럽 인수 시도를 중단했다.[35] 6일 후, 폼페이 서포터즈 트러스트는 클럽 구매 조건부 계약을 체결했다.[36] 포츠머스는 23경기 연속 무승 기록을 세웠다.[37] 2013년 4월 10일, 행정 관리자와의 계약이 체결되었지만,[38] 폼페이 서포터즈 트러스트는 구매를 완료하지 못했다.[39] 포츠머스는 시즌 말에 강등되어 33년 만에 4부 리그로 떨어졌다.[40] 2013년 4월 19일, 폼페이 서포터즈 트러스트(PST)의 클럽 구매 계약이 완료되어 포츠머스는 행정 관리에서 벗어났다.[41]
2013-14 시즌, 잦은 감독 교체와 비(非) 리그 강등 위협 속에서 앤디 아우포드가 임시 감독을 맡아 팀을 강등권에서 벗어나게 했다.[42][43] 2014년 9월, 클럽은 채권자와 과거 선수들에게 대한 잔여금을 모두 상환하고 부채가 없다고 발표했다.[44] 2014-15 시즌 실패 후, 폴 쿡이 2015년 5월 포츠머스의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45] 2016-17 시즌, 폴 쿡의 팀은 노츠 카운티를 3-1로 꺾고 리그 원으로 승격했고, 이후 챔피언으로 확정되었다.[47][48] 그러나 폴 쿡은 2017년 5월 위건 애슬레틱으로 이적하기 위해 사임했다.[49]
2017년 8월 3일, PST는 전 디즈니 CEO였던 마이클 아이스너 소유의 투자회사인 토르난테 컴퍼니에 구단을 매각했다.
2. 6. 2017-현재: 재도약
2017년 5월, 폼페이 서포터스 트러스트(PST)는 전 디즈니 최고 경영자 마이클 아이스너가 이끄는 더 토르난테 컴퍼니(The Tornante Company)가 구단을 인수하려는 제안에 찬성 투표를 했고, 이는 2017년 8월 3일에 완료되었다.[50] 포츠머스 FC는 EFL 리그 원으로 복귀한 첫 2017–18 EFL 리그 1 시즌을 8위로 마쳤다.[51] 다음 시즌에는 EFL 트로피에서 선덜랜드를 승부차기 끝에 꺾고 결승전에서 우승했지만, 같은 팀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했다.[52][53]포츠머스는 2020년 4월 5일, 샐퍼드 시티를 상대로 EFL 트로피 타이틀을 방어하기 위해 웸블리 스타디움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3월 13일에 시즌이 중단되었다.[54][55] 리그가 중단된 후, 경기당 획득 승점 계산에 따라 폼페이는 무관중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 유나이티드에게 승부차기로 패했다.[57]
지연된 2020 EFL 트로피 결승전은 결국 2021년 3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무관중으로 치러졌고, 포츠머스는 샐퍼드 시티에게 승부차기로 패했다.[58] 플레이오프 진출에 아깝게 실패하는 세 시즌을 보낸 후, 2023–24 시즌 챔피언으로 승격하며 2부 리그 아래에서 12년 동안의 시간을 끝냈다.[6][59]
3. 클럽 정체성
포츠머스 FC의 팀 컬러는 항구 도시라는 특징을 살려 파란색으로 정해졌다. 엠블럼은 닻을 나타내는 팔각별과 칼을 변형시킨 모양인데, 이는 이 지역과 연고가 있는 리처드 1세의 문장에서 유래했다.[60] 1850년대부터 포츠머스에서는 뱃사람이나 의사들 사이에서 축구가 친숙하게 여겨졌고, 1898년 지역 맥주 공장 오너였던 존 브릭우드를 중심으로 현재의 클럽이 설립되었다.[66]
3. 1. 클럽 배지
포츠머스 FC는 1898년에 창단되었지만, 1913-14 시즌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클럽 배지가 도입되었다. 포츠머스 시의 공식 문장은 파란색 방패에 금색 팔각별과 초승달을 담고 있는데, 이는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정복한 후 비잔틴 황제의 총독이었던 아이작 콤네노스의 깃발에서 가져온 "푸른 바탕에 금색 초승달과 빛나는 팔각별"을 시에 부여하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1913년, 포츠머스 FC의 첫 번째 배지는 포츠머스 시의회 공식 상징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금색 팔각별과 금색 초승달이 특징이었다. 첫 배지는 파란색 사각 방패 중앙에 흰색 오각별과 그 아래 가로로 긴 흰색 초승달이 있는 형태였다. 포츠머스 시의회는 클럽에게 색상과 디자인을 일부 변경하는 조건으로 초승달과 별 문양을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소유권은 아님).[60]
포츠머스 FC는 클럽 역사 동안 다양한 배지 변형을 시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포츠머스 시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팔각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66]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전통적인 배지가 금색 대신 흰색으로 셔츠에 새겨졌는데, 이는 흰색이 더 비싼 금색 실보다 저렴했기 때문이다. 1980년부터 1989년까지는 전통적인 별과 초승달 배지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으로 바꾸었다. 이 배지는 닻(영국 해군 상징)과 칼(영국 육군 상징) 앞에 축구공이 놓여 있는 모습이었으며, 전체 디자인은 배를 묶는 밧줄 모양의 외부 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다른 버전에서는 축구공 대신 전통적인 별과 초승달 배지의 원형 버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는 칼과 닻 배지가 삭제되고, 더 단순한 팔각별과 초승달이 긴 좁은 방패 위에 놓인 디자인으로 변경되었다.[61] 1993년부터 1997년까지는 1989-93년의 긴 좁은 방패 디자인 대신 포츠머스 시의 문장을 수놓은 배지를 사용했다.[61][62] 1997년에는 1993-97년의 시 문장 배지 대신 파란색 방패에 금색 팔각별과 금색 초승달을 금색 외부 테두리로 감싼 형태가 사용되었다. 이 새 배지는 1997-98 시즌의 창단 100주년 기념과 맞물려 도입되었다.
2008년 5월 6일, 포츠머스는 방패 상단의 "세 개의 점"을 두 개의 직선 각도로 바꾸고, 방패의 별 위에 "포츠머스 FC"를 새겨 넣은 새 배지를 공개했다.[63] 전통적인 길쭉한 초승달은 시 문장에 있는 것과 매우 비슷한 새로운 원형 초승달로 대체되었다. 이 새 배지는 포츠머스가 새로운 110주년 기념 올블루 홈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2008년 FA컵 결승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2014-15 시즌에는 제1차 세계 대전 10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클럽은 배지를 더 전통적인 배지로 일시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 6월, 포츠머스는 공식 클럽 배지를 전통적인 디자인으로 되돌렸다.
2017년 5월 4일, Tornante Company와 서포터즈 트러스트 간의 회의에서, 새로운 소유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측은 전통적인 포츠머스 배지와 관련된 소유권 및 저작권 문제를 확인했다. 포츠머스 풋볼 클럽은 배지의 상징을 법적으로 "소유"하지 않았으며, 1913년부터 포츠머스 시의회로부터 "대여"받은 것이었다.[64] 2018년 3월 15일, 2018-19 시즌을 앞두고 두 개의 새롭게 디자인된 클럽 배지가 공개되었다(하나는 선수 셔츠용, 다른 하나는 상업적 목적용).[65]
3. 2. 홈 유니폼
포츠머스 FC의 첫 유니폼은 1899-1900 시즌에 사용되었으며, 연어색 셔츠, 진홍색 칼라와 커프스, 흰색 반바지, 검은색 양말로 구성되었다.[66] 이 연어색 셔츠 때문에 초창기 포츠머스는 '새우(The Shrimps)'라는 별명을 얻었다.[66] 1909-10 시즌에는 흰색 셔츠, 남색 반바지와 양말로 변경되었다.1912-13 시즌부터는 하늘색 셔츠, 흰색 반바지, 검은색 양말로 변경되었고, 1933-34 시즌부터는 셔츠가 로열 블루로 바뀌었다.[67] 1947-48 시즌부터는 검은색 양말이 빨간색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클럽의 가장 성공적인 시기와 맞물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68] 1966년부터 1976년까지는 여러 번 유니폼 조합이 바뀌었지만, 1976년에 다시 파란색 셔츠, 흰색 반바지, 빨간색 양말로 돌아왔다.[6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버나드 '몬티' 몽고메리 원수가 포츠머스 근처에 주둔하면서 포츠머스 경기에 자주 참석했고, 명예 회장이 되었다. 몽고메리의 제안으로, 붉은색 양말은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도입되었다.[69][70] 붉은색은 영국 육군의 전통적인 색상이자 현충일의 양귀비 색상이기도 하다.[69][70]
2008-09 시즌에는 클럽 창립 110주년을 기념하여 2008 FA컵 결승전에서 선보였던 올 블루 유니폼을 착용했다.[66] 2009-10 시즌 이후에는 다시 전통적인 파란색-흰색-빨간색 홈 유니폼으로 복귀했다.
다음은 포츠머스 FC의 홈 유니폼 제조사와 셔츠 스폰서 목록이다.
연도 | 제조사 | 셔츠 스폰서 |
---|---|---|
1976–1977 | 엄브로 | 스폰서 없음 |
1978–1980 | 애드미럴 | |
1980–1983 | 골라 | |
1983–1984 | 르 코크 스포르티브 | |
1985–1987 | 엄브로 | |
1987–1989 | 애드미럴 | 사우스 코스트 피아트 (1987년 12월 처음 등장) |
1989–1991 | Scoreline | 굿맨스 |
1991–1993 | Influence | |
1993–1995 | 아식스 | |
1995–1997 | 더 뉴스 | |
1997–1999 | 애드미럴 | KJC 모바일 폰 |
1999–2000 | Pompey Sport 1 | The Pompey Centre |
2000–2002 | Bishop's Printers | |
2002–2005 | TY Europe | |
2005–2007 | 자코 | OKI |
2007–2009 | 캔터베리 | |
2009–2010 | Jobsite.co.uk | |
2010–2011 | 카파 | |
2011–2013 | ||
2013–2018 | 손디코 | |
2018–현재 | 나이키 | 포츠머스 대학교 |
'''1''' 포츠머스 자체 제조사.
3. 3. "Pompey" 별명
포츠머스 FC의 전통적인 별명은 '''폼페이'''이며, 이는 잉글랜드 도시 포츠머스와 그곳의 왕립 해군 기지와 오랫동안 연관되어 온 별명이다. '폼페이'라는 별명의 정확한 기원은 여러 설이 있어 역사학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3. 4. "The Pompey Chimes" 응원가
포츠머스 FC의 서포터들이 부르는 가장 유명한 응원가는 "The Pompey Chimes"이다.[83][84] 이 응원가는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가장 오래된 축구 응원가 중 하나로 여겨진다."The Pompey Chimes"는 원래 "The Town Hall Chimes"로 불렸으며, 189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포츠머스를 기반으로 한 가장 인기 있고 성공적인 아마추어 축구팀이었던 영국 육군 포병 연대 팀인 '''로열 아티러리 (포츠머스) 축구 클럽'''의 서포터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로열 아티러리는 유나이티드 서비스 레크리에이션 그라운드에서 홈 경기를 치렀으며,[85] 1898년 포츠머스 FC가 창단되기 전에 이미 "Pompey"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86]
근처의 포츠머스 타운 홀은 1890년에 완공되었으며, 매 15분마다 다양한 웨스트민스터 쿼터 차임을 울렸다. 축구 심판들은 타운 홀의 시계 종소리를 오후 4시에 축구 경기가 종료될 시간을 알리는 기준으로 사용했다. 오후 4시 직전에 서포터들은 타운 홀의 차임과 맞춰 경적 소리가 울리면 일제히 노래를 부르며 심판에게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도록 격려했다. "The Pompey Chimes"의 원래 가사(1900–01 포츠머스 FC 공식 핸드북에 인쇄됨)는 다음과 같았다.
''플레이 업 폼페이,''
''골 하나만 더!''
''출발해! 야호!''
''할로! 할로!!''
1898–99년 FA 아마추어 컵에서 프로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로열 아티러리 (포츠머스) FC가 퇴출된 후, 로열 아티러리의 많은 서포터들은 1899년 포츠머스 FC로 충성도를 변경하여 "Town Hall Chimes" 응원가와 "Pompey"라는 별명을 프래턴 파크로 가져갔다.
The Pompey Chimes는 오늘날에도 프래턴 파크에서 불리고 있으며, 더 빠른 템포로 진화했고 차임 스타일이 짧아져 일반적으로 두 번 울린다.
''플레이 업 폼페이,''
''폼페이, 힘내!''
''플레이 업 폼페이,''
''폼페이, 힘내!''
The Chimes는 포츠머스 선수들이 세트피스 킥을 하기 전에, 포츠머스 팀에 대한 격려의 의미로 포츠머스 서포터들이 부르는 것을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다.
4. 경기장
포츠머스 FC는 포츠머스 교외 밀턴에 위치한 프래턴 파크에서 홈 경기를 치른다. 이 축구장은 클럽 역사 전체에 걸쳐 홈구장 역할을 해왔다. 1898년, 새롭게 창단된 '포츠머스 풋볼 & 애슬레틱 컴퍼니'가 부지를 매입하기 전에는 감자밭이었다.
프래턴 파크는 1899년에 포츠머스 이사이자 건축가였던 알프레드 본에 의해 설계 및 완공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5일에 처음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899년 초 프래턴 파크는 경기장 남쪽에 지붕이 있는 전 좌석 스탠드 하나만 갖추고 있었다. 프래턴 파크에서 열린 첫 번째 축구 경기는 1899년 9월 6일에 열린 사우스햄튼과의 친선 경기였으며, 포츠머스가 2-0으로 승리했다. 첫 번째 공식 경기는 3일 뒤인 1899년 9월 9일에 열린 레딩과의 사우스 리그 디비전 1 경기였으며, 이 경기 역시 포츠머스가 2-0으로 승리했다.
1905년, 클럽은 프래턴 파크를 확장하여 프로그모어 로드의 남서쪽 코너에 모크 튜더 스타일의 클럽 파빌리온을 추가했는데, 이 파빌리온은 알프레드 본이 설계했다. 이 파빌리온은 원래 북동쪽 코너에 높고 팔각형의 시계탑 첨탑이 있었고, 그 아래에 상단 관람석이 설치되어 프래턴 파크 전체 경기장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었다. 또한 두 개의 새로운 흙둑 테라스가 두 골대 뒤에 지어졌으며, 그 위에는 잿더미와 나무 판자가 덮여 있었다. 이 테라스는 처음에 '프래턴 레일웨이 엔드'와 '밀턴 엔드'(또는 '스파이온 코프')로 알려졌으며 각각 서쪽과 동쪽 골라인 뒤에 건설되었다.
파빌리온의 시계탑은 1920년대에 철거되었는데, 이는 사우스 스탠드가 파빌리온 부지에 부분적으로 건설되었고, 파빌리온의 원래 동쪽 면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1935년, 아치볼드 레이치는 프래턴 파크를 위해 더 큰 규모의 노스 스탠드를 설계했다. 1949년 2월 26일, FA컵 6라운드 경기에서 더비 카운티를 상대로 2-1로 승리하며 51,385명의 서포터가 입장,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 프래턴 레일웨이 엔드는 1956년에 철거되었고, '프래턴 엔드'라고 불리는 새로운 조립식 콘크리트 및 철골 스탠드로 대체되었다. 프래턴 파크는 1996년에 전 좌석 축구장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전 최대 수용 인원이 크게 줄었다. 1997년 10월에는 새로운 프래턴 엔드가 개장했다. 이전 계획은 1990년대 초에 처음 제기되었지만, 여러 반대와 재정적 문제로 인해 클럽은 프래턴 파크에서 계속 경기를 치르고 있다.
5. 라이벌
포츠머스의 주요 라이벌은 31.8km 거리에 있는 사우샘프턴이다.[74] 사우스 코스트 더비는 두 클럽이 서로 다른 디비전에 속해 있어 잉글랜드 축구에서 자주 열리는 라이벌 관계는 아니지만, 이로 인해 경기의 치열함이 더해지는 경우가 많다.
1960년대 중후반 이전에는 포츠머스와 사우샘프턴 간의 라이벌 관계는 리그 순위 차이로 인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 더비 매치는 드문드문 열렸다. 1977년 이후, 두 팀은 1987-88, 2003-04, 2004-05, 2011-12 시즌 단 네 번만 같은 디비전에 속했다.[75] 2024년 6월 현재, 두 클럽은 모든 대회를 통틀어 71번 맞붙었으며, 포츠머스가 21번, 사우샘프턴이 35번 승리했고, 15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75] 두 팀의 가장 최근 경기는 2019년 9월 EFL컵에서 열렸으며, 사우샘프턴이 프래튼 파크에서 4-0으로 승리했다.[75]
많은 포츠머스 서포터들은 사우샘프턴 팬들을 비하하는 멸칭인 '''''스커머''''''(복수형: '''''스커머스''''')를 사용하거나, 그들의 축구 클럽, 나아가 사우샘프턴 시 전체를 포함하는 단체로 지칭하기 위해 '''''스컴''''''(Scum)을 사용한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스커머스''는 해적 또는 해적을 의미하는 해군 용어에서 유래된 멸칭으로, 1585년에 처음 사용된 기록이 있다.[76][77]
한편, 사우샘프턴 팬들은 1987-88 시즌부터 ''스커머''에 대한 반박으로 포츠머스 서포터들에게 똑같이 멸칭인 '''''스케이트''''''(Skate)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는 1988년 사우샘프턴 기반의 서포터 팬진인 "The Ugly Inside"가 편집한 모욕적인 표현 목록에서 사우샘프턴 팬들이 비공식적으로 선택한 것이다.[78] 아이러니하게도, 선택된 별명 ''스케이트''는 실제로 포츠머스 시민들로부터 도용된 것으로, 이들은 오랫동안 포츠머스 조선소 및 기타 왕립 해군 시설에 주둔하는 선원들을 멸시하거나 별칭으로 ''스케이트''를 사용해 왔다.
미디어가 "도크야드 더비"라고 부르는 또 다른 라이벌 관계는 플리머스 아가일과의 관계이다.[79][80] 이 라이벌 관계는 항구의 전투(Battle of the Ports)로도 알려져 있다.[81] 최근 시즌에는 선덜랜드와도 약간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주로 2018-19 시즌에 두 클럽이 5번이나 만났기 때문이다.[82]
6. 선수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한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역대 주요 선수'''
연도 | 이름 | 국적 |
---|---|---|
1968 | 레이 포인터영어 | |
1969 | 존 밀킨스영어 | |
1970 | 니키 제닝스영어 | |
1971 | 데이비드 멍크스영어 | |
1972 | 리치 레이놀즈영어 | |
1973 | 해당 없음 | |
1974 | 폴 벤트영어 | |
1975 | 믹 멜로우즈영어 | |
1976 | 폴 캐힐영어 | |
1977 | 해당 없음 | |
1978 | 해당 없음 | |
1979 | 피터 멜러영어 | |
1980 | 조 레이들로영어 | |
1981 | 해당 없음 | |
1982 | 앨런 나이트영어 | |
1983 | 앨런 빌리영어 | |
1984 | 마크 헤이틀리영어 | |
1985 | 닐 웹영어 | |
1986 | 노엘 블레이크일본어 | |
1987 | 노엘 블레이크일본어 | |
1988 | 배리 혼cy | |
1989 | 미키 퀸영어 | |
1990 | 가이 휘팅엄영어 | |
1991 | 마틴 쿨영어 | |
1992 | 대런 앤더턴영어 | |
1993 | 폴 월시영어 | |
1994 | 키트 사이먼스cy | |
1995 | 앨런 나이트영어 | |
1996 | 앨런 나이트영어 | |
1997 | 리 브래드버리영어 | |
1998 | 앤디 오포드영어 | |
1999 | 스티브 클라리지영어 | |
2000 | 스티브 클라리지영어 | |
2001 | 스콧 하일리영어 | |
2002 | 피터 크라우치영어 | |
2003 | 린보이 프리머스영어 | |
2004 | 아르얀 데 제우nl | |
2005 | 데얀 스테파노비치sr | |
2006 | 게리 오닐영어 | |
2007 | 데이비드 제임스영어 | |
2008 | 데이비드 제임스영어 | |
2009 | 글렌 존슨영어 | |
2010 | 제이미 오하라영어 | |
2011 | 헤이든 멀린스영어 | |
2012 | 히카르두 호샤pt | |
2013 | 요하네스 에르틀de | |
2014 | 리키 홈스영어 | |
2015 | 제드 월리스영어 | |
2016 | 마이클 도일ga | |
2017 | 엔다 스티븐스ga | |
2018 | 매튜 클라크영어 | |
2019 | 매튜 클라크영어 | |
2020 | 크리스티안 버지스영어 | |
2021 | 크레이그 맥길리브레이sco | |
2022 | 숀 라게트영어 | |
2023 | 콜비 비숍영어 | |
2024 | 말론 팩영어 |
더 자세한 내용 및 100경기 이상 포츠머스에서 활약한 선수 목록은 ''포츠머스 FC 선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1. 현재 선수 명단
기준 선수명단.[100]
번호 | 포지션 | 이름 | 국적 |
---|---|---|---|
1 | GK | 윌 노리스 | |
2 | DF | 조던 윌리엄스 | |
3 | DF | 코너 오길비 | |
4 | DF | 라일리 타울러 | |
5 | DF | 리건 풀 | |
6 | DF | 코너 쇼네시 | |
7 | MF | 말론 팩 | 주장 |
8 | MF | 프레디 포츠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서 임대 |
9 | FW | 콜비 비숍 | |
10 | FW | 쿠시니 옌기 | |
11 | FW | 마크 오마호니 | 브라이턴 & 호브 알비온 FC에서 임대 |
13 | GK | 니콜라스 슈미트 | |
14 | MF | 벤 스티븐슨 | |
15 | FW | 크리스찬 세이디 | |
16 | DF | 톰 매킨타이어 | |
17 | MF | 오웬 옥슨 | |
18 | FW | 엘리아스 소렌센 | |
19 | DF | 제이콥 파렐 | |
20 | FW | 사무엘 실베라 | 미들즈브러 FC에서 임대 |
21 | MF | 앙드레 도젤 | |
22 | DF | 자크 스완슨 | |
23 | FW | 조쉬 머피 | |
24 | MF | 테리 데블린 | |
25 | MF | 아브둘라예 카마라 | |
26 | MF | 톰 로어리 | |
29 | FW | 하비 블레어 | |
30 | MF | 맷 리치 | |
31 | GK | 조던 아처 | |
32 | FW | 패디 레인 | |
33 | GK | 토비 스튜어드 | |
34 | DF | 이바네 보왓 | |
49 | FW | 칼럼 랭 |
6. 2. 명예의 전당
포츠머스 FC는 2009년 3월에 구단의 전 선수와 직원을 기리기 위해 명예의 전당을 설립했다.[106] 매년 열리는 이 행사는 올해의 헌액자를 발표하고 참석자들을 위한 만찬을 제공한다.다음 선수들이 포츠머스 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모든 출전 기록과 골 기록은 Soccerbase에 따릅니다. *는 포츠머스 FC 위민스 선수임을 나타냅니다.''
헌액 연도 | 이름 | 국적 | 포지션 또는 역할 | 선수 경력 | 감독 경력 | 선수 출장 | 선수 골 |
---|---|---|---|---|---|---|---|
2009[107] | 지미 디킨슨 | LH | 1946–65 | 1977–79 | 828 | 10 | |
피터 해리스 | OF | 1946–60 | — | 515 | 211 | ||
레이 히론 | FW | 1964–75 | — | 364 | 117 | ||
앨런 나이트 | GK | 1978–2000/2003–04 | — | 801 | 0 | ||
가이 위팅엄 | ST | 1992–94 | 2012–13 | 249 | 112 | ||
2010[108] | 렌 필립스 | IF | 1946–56 | — | 271 | 55 | |
존 밀킨스 | GK | 1961–74 | — | 389 | 0 | ||
믹 테이트 | FW | 1980–87 | — | 280 | 32 | ||
앤디 오포드 | CB | 1989–2000 | 2014–15 | 341 | 3 | ||
더기 리드 | IF | 1946–56 | — | 323 | 134 | ||
2011[109] | 잭 프로갓 | LH | 1946–54 | — | 279 | 65 | |
조니 고든 | IF | 1949–58/1961–67 | — | 489 | 106 | ||
앨런 맥러플린 | CM | 1992–99 | — | 309 | 54 | ||
린보이 프리머스 | CB | 2000–09 | — | 219 | 6 | ||
폴 월시 | ST | 1992–94/1995–96 | — | 113 | 26 | ||
2012[110] | 레그 플루윈 | CB | 1937–53 | — | 167 | 0 | |
노먼 파이퍼 | LW | 1970–78 | — | 356 | 57 | ||
앨런 빌리 | FW | 1982–84 | — | 115 | 57 | ||
스티브 클라리지 | ST | 1998/1998–2001 | 2000–01 | 124 | 37 | ||
2013[111] | 미키 퀸 | ST | 1985–88 | — | 137 | 68 | |
지미 스코울러 | WH | 1945–53 | — | 268 | 8 | ||
론 손더스 | ST | 1958–64 | — | 259 | 156 | ||
에오인 핸드 | U | 1968–76/1977–79 | — | 307 | 14 | ||
키트 시몬스 | DF | 1988–95 | — | 220 | 11 | ||
2014[106] | 어 버틀러 | GK | 1946–53 | — | 240 | 0 | |
아르얀 데 제우 | CB | 2002–05 | — | 118 | 5 | ||
빌리 길버트 | CB | 1984–89 | — | 159 | 0 | ||
해리 해리스 | WH/IF | 1958–70 | — | 403 | 49 | ||
니키 제닝스 | LW | 1967–74 | — | 227 | 50 | ||
2015[112] | 아이크 클라크 | ST | 1947–53 | — | 129 | 58 | |
데이비드 제임스 | GK | 2006–10 | — | 157 | 0 | ||
케빈 딜런 | CM | 1983–89 | — | 249 | 56 | ||
조지 레이 | LB/LW | 1967–72 | — | 204 | 11 | ||
빌리 윌슨 | FB | 1972–79 | — | 216 | 6 | ||
아서 이절턴 나이트 | LB | 1908–22 | — | 206 | 0 | ||
2016[113] | 스베토슬라프 토도로프 | ST | 2001–07 | — | 83 | 33 | |
노엘 블레이크 | CB | 1984–88 | — | 173 | 14 | ||
데이브 켐프 | ST | 1976–78 | — | 74 | 48 | ||
빌리 헤인스 | FW | 1922–28 | — | 164 | 119 | ||
2017[114] | 폴 머슨 | MF | 2002–03 | — | 44 | 12 | |
콜린 가우드 | ST | 1978–80 | — | 71 | 34 | ||
클리프 파커 | OL | 1933–51 | — | 242 | 57 | ||
빈스 힐레어 | MF | 1984–88 | — | 146 | 25 | ||
2018[115] | 알렉스 윌슨 | FB | 1949–67 | — | 350 | 4 | |
앨런 로저스 | FW | 1979–84 | — | 161 | 15 | ||
마크 헤이틀리 | ST | 1983–84 | — | 38 | 22 | ||
믹 케네디 | CM | 1984–87 | — | 129 | 4 |
'''참고:'''
GK = 골키퍼 | CB = 센터백 | LB = 레프트백 | RB = 라이트백 | FB = 풀백 | LH = 레프트 하프 | RH = 라이트 하프 | WH = 윙 하프 |
CM = 중앙 미드필더 | LW = 레프트 윙어 | RW = 라이트 윙어 | OF = 아웃사이드 포워드 | IF = 인사이드 포워드 | FW = 포워드 | ST = 스트라이커 | U = 유틸리티 플레이어 |
7. 클럽 경영
포츠머스 FC는 1898년 존 브릭우드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1920-21 시즌 프로 리그(3부)로 승격한 후, 1926-27 시즌 2부 리그 2위를 차지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 1938-39 시즌 FA컵 우승,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8-49 시즌과 1949-50 시즌 리그 연속 우승 및 커뮤니티 실드 동시 우승을 차지했다.
1950년대 이후 침체기에 접어들어 여러 차례 강등을 겪었으나, 1986-87 시즌 2부 리그 2위를 기록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 그러나 1년 만에 강등되어 15년간 2부 리그에 머물렀다.
2002년 해리 레드냅 감독 부임 후 2002-03 시즌 2부 리그에서 우승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다. 2006년 알렉산드르 가이다마크 구단주 부임 이후 솔 캠벨, 누앙코 카누 등 대표급 선수들을 영입하여 전력을 강화했고, 2007-08 시즌 리그 8위와 함께 FA컵에서 우승했다.
2008-09 시즌 금융 위기로 부채를 안게 되었고, 잦은 구단주 교체와 경영난을 겪었다. 2009-10 시즌에는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최초로 파산 신청을 하여 승점 9점이 삭감되었고, 결국 강등되었다.
2011-12 시즌 블라디미르 안토노프 구단주 부임 후 금융 관련 부정 거래 혐의로 체포되면서 다시 파산 신청을 했고, 승점 10점이 삭감되어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2013년 팬들이 설립한 "폼페이 서포터스 트러스트 (PST)"가 클럽을 인수하여 국내 최대의 시민 클럽으로 재탄생했고, 2014년 9월 700만 파운드의 부채 상환을 완료했다.
2017년 8월 3일, 전 월트 디즈니 컴퍼니 최고 경영자인 마이클 아이즈너가 5.76억파운드에 인수하였다.[139] 2023-24 시즌 리그 1 (3부)에서 우승하여 12년 만에 챔피언십 (2부) 복귀를 결정했다.[140]
7. 1. 코칭 스태프
에릭 아이스너브렉 아이스너
앤더스 아이스너
앤디 레드먼
마크 캐틀린